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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인물

열사 이준

관리자 2024-03-14 조회 356 추천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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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李儁, 1859~1907, 초명 璿在, 아호 一醒)는 조선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격동기 시대에 애국계몽가로서, 대한제국의 검사로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특사로서 활동한 역사적 인물이다. 


이준은 함경도 북청 향시에 두 번 합격(12세와 29세)하였으며, 17세에 상경하여서 용암 김병시 대감 댁의 서생(書生)으로 있었다. 갑오개혁(1894년)이 일어난 35세에 순릉 참봉의 첫 관직에 들어섰으나, 곧 사직하고 근대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서울대 법대의 전신)에서 최초로 법률교육을 받았고, 졸업하자마자 첫 번째로 검사시보에 임명되었다. 임명되자 곧 아관파천(1896년)의 사건이 일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준은 애국계몽 운동의 초기 활동가로서, 회장으로 활동한 단체들은 적십자회, 보안회와 협동회, 공진회, 헌정연구회, 국민교육회, 한북흥학회 등이 있고, 이외에도 을사보호조약의 반대운동,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으로 국채보상운동과 외국 소유의 철도상환운동의 발기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의 평리원(당시 최고법원 겸 경찰청)의 검사 시절에는 사람들로부터 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 불리울 정도로 강직한 검사이었다. 


  이준은 애국계몽가로서 연설가이기도 하였으며, 특히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로 떠나기 이틀 전에 행한 ‘생존경쟁’ 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큰 나라는 큰 땅이 아닌 큰 인물의 나라’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특사로 파견되어 일제의 을사보호조약은 불법임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평화회의 기간 중에 사망하여 이역 땅에서 반세기 동안 묻혔었다.



출처: 「조국의 주권회복을 위해 살신성인한 열사 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