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파 안소공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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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공 소개

안소공

임금의 치제문

< 임금의 치제문 >
〇 완원부원군 이양우


조선왕조실록

1417년 태종 17년

2월 1일

• 완원 부원군 이양우의 졸기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가 졸(卒)하니,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쌀·콩 아울러 50석, 종이 1백 권을 치부(致賻)061) 하였다. 시호(諡號)를 안소(安昭)라 하고, 장례는 상등(上等)의 예(禮)를 썼다.

1417년 태종 17년

2월 7일

• 이양우의 죽음으로 소선하였다

대언(代言) 이명덕(李明德) 등이 육선(肉膳) 을 올렸다. 임금이 이양우(李良祐)의 죽음으로 인하여 소선(素膳)한 지 오래 되었는데, 이명덕·목진공(睦進恭) 등이 육선을 올리니 이를 허락하고, 인하여 감자(柑子: 귤) 한 그릇씩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내가 경 등이 모두 늙은 어미가 있는 줄 아는 까닭에 이를 내려 주는 것이다. 내 매양 제릉(齊陵: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능) 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恨)으로 여겨 왔는데, 참으로 부럽구나.“


1419년 세종 1년

2월 13일

부친상을 마친 세 아들이 뵈니 상왕이 술자리를 베풀다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아들 이흥노(李興潞)·이흥제(李興濟)·이흥발(李興潑)들이 3년상을 마치고 들어와 뵈오니, 상왕은 술을 마련하여 위로하는데, 임금은 종친들을 인솔하고 상왕을 모시고 잔치하였다. 상왕은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데, 잔치하며 술을 마시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완원(完原)의 아들이 상기를 마치고 찾아왔기 때문에 작은 잔치를 베푼 것이다.“


고 하였다. 이양우는 이원계(李元桂)의 아들이다.


〇첫째아들 이흥발

1439년 세종 21년

7월 10일

• 동지중추원사 이흥발의 졸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흥발(李興發)이 죽었다. 흥발은 태조(太祖)의 서형(庶兄)인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원계(李元桂)의 손자인데, 처음에 의친(議親)으로 벼슬[筮任]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동지총제(同知摠制)·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평안(平安)·전라(全羅)·충청(忠淸) 3도의 도절제사에 이르렀고, 두 번이나 명나라의 조정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57세였다. 시호(諡號)를 평안(平安)이라 하였으니, 다스렸으되 과실이 없음을 평(平)이라 하고, 화목함을 좋아하고 다투지 아니함을 안(安)이라 한다. 아들이 있으니 이계인(李繼仁)이었다.


〇둘째아들 이흥제

1421년 세종 3년

8월 13일 

총제 이흥제의 졸기

총제(摠制) 이흥제(李興濟)가 죽으니, 부의(賻儀)를 주었다. 흥제는 양우(良祐)의 아들이다.

1421년 세종 3년

8월 20일

총제 이흥제에게 내린 사제의 교지

예조 좌랑 박기(朴頎)를 보내어 총제 이흥제(李興濟)에게 사제(賜祭)하는 교지에 말하기를,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은 공도의 이치로서 항상 그러한 것이나, 경(卿)에 있어서는 더 한층 마음이 쓰여진다. 경은 풍신과 자품이 웅장하고 넉넉하려니와, 뜻과 행실이 순전하고 부지런하였다. 종자(宗子)와 친의로 붙여 있게 되었으니, 실로 나라 지키는 굳은 성(城)이었다. 어느덧 총제(摠制) 자리에 오르게 되어, 나의 몸을 도우리라고 기대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장성한 연기로 문득 다른 곳으로 가게 될 줄이야. 진실로 나의 마음속의 슬픔을 기울여서 박한 전물(奠物)을 가져다 드리게 한다. 슬프다. 척분으로서의 은애(恩愛)와 군신간의 의로서, 정이 이미 화목하기에 두터웠으니, 예(禮)로도 당연히 슬퍼함과 영귀하게 하기에 극진하여야 하리라."


하였다.


〇세째아들 이흥로

1426년 세종 8년

2월 1일

• 사망한 첨지돈녕 이흥로에게 부조하다

죽은 첨지돈녕(僉知敦寧) 이흥로(李興露)에게 부조로 쌀과 콩 20석과 종이 80권을 내렸다.

1426년 세종 8년

2월 3일 

• 사망한 첨지돈녕부사 이흥로에게 치제하게 하다

전지하여, 사망한 첨지돈녕부사 이흥로(李興露)에게 치제(致祭)하는 절차를 죽은 부윤(府尹) 원숙(元肅)에게 치제하던 예에 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426년 세종 8년

2월 7일

• 사망한 첨지돈녕부사 이흥로에게 치제하다

내시(內侍) 윤덕인(尹德仁)을 보내어 사망한 첨지돈녕부사 이흥로(李興露)에게 치제하였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길고 짧은 것은 한정이 있으므로 생명도 운수를 피하기가 어려운 것이나, 은정과 의리가 아울러 두터웠던 터이라 슬픈 정회를 견딜 수 없노라. 생각건대 그대는 천성이 충성스럽고 순수하며, 몸가짐이 깨끗하고 검소하였도다. 재간은 활을 쏘는 데 능하였고, 역량은 장군의 직책을 맡을 만하였도다. 나는 실로 그대를 인재로 여기고 있었으며, 앞으로 그대를 의지하려 하였는데, 미처 크게 쓰이기 전에 어찌하여 젊은 나이로 이렇게 가버렸는가. 아아, 하늘이 인재를 내어놓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끝난단 말인가. 여기에 비박한 음식을 차려서 그대의 영혼을 위로하노라. 아아, 친척간의 정리는 처음이나 끝이나 다름이 없고, 슬퍼하며 영화를 베푸는 예절은 살았을 때에나 죽은 뒤라도 마찬가지로 극진히 하리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