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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공 소개

안소공

완원부원군 안소공 이양우

<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안소공(安昭公) 이양우(李良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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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소공 이양우 • 안소공 이양우의 연보 • 안소공 신도비명: 자헌대부 홍문관 학사 벽진 이우면 • 안소공 공신록 • 안소공 본가와 후손들의 관리

▣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안소공(安昭公) 이양우(李良祐)

• 생졸

1346년(충목왕1)~1417년(태종17), 72세

• 시호

안소(安昭)

• 군호

조선개국 약 20일 후 환조의 적장손이기에 태조 왕자들과 함께 유일하게 봉작을 받음. 영안군(寧安君. 태조 1년 1392.8.7.), 영안후(寧安侯. 태조 7년 1398.9.1.), 영안군(寧安君. 태종 1년 1401.1.25.),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태종 12년 1412.5.3.).

• 요약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관이자 왕족 종실(王族 宗室)이며, 조선개국의 정사공신(定社功臣)이다.

• 가계

할아버지는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이고, 아버지는 태조의 백형(伯兄)인 이원계(李元桂)이며,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의 형이다. 자식으로는 네 명의 아들(흥발, 흥제, 흥로, 흥미)과 딸 1명을 두었다. 넷째 아들 이흥미(興美)는 조선왕조실록 환조대왕의 가계에 기록되어 있으나, 아마도 조졸하여 보첩에는 오르지 않은 것 같다.

•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선산박씨(善山朴氏)로서 예조전서(종1품) 박정원(朴廷元)의 따님

• 생애

고려 말기에 사복정(司僕正 정3품) 벼슬을 역임하였고, 조선개국 약 20일 후(1392.8.7.)에 태조 이성계의 왕자들과 함께 유일하게 영안군(寧安君)이라는 군호를 받았는데, 이는 환조의 적장손이기 때문이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王子)의 난 때 정사공신(正社功臣) 2등으로 봉해졌고, 태종 2년(1402)에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정2품)가 되었다. 이때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겸직하였다. 태종 8년(1408) 사은사(謝恩使) 정사(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태종 12년(1412) 완원부원군에 진봉된 후 품계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정1품)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산27에 있고, 순종 2년(1908) 7월에 건립된 신도비(神道碑)의 비문은 홍문관 학사 벽진 이우면(李愚冕)이 짓고, 당대 명필 전 이조판서 해평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썼다. 후손인 군부대신 이용익(16대손)은 이 비의 전서(篆書)를 당당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원속보(1900년), 완풍보감(2003년, 완원부원군 안소공 휘 양우), 정명사상을 실천한 완풍대군 이원계와 그 후손들(2022년, 효孝로 인仁을 다한 안소공 이양우),

▣ 안소공 이양우의 연보
연도 왕조 나이 주요행적
1346 고려
충목왕 2
탄생 • 이원계의 장남으로 이자춘(환조)의 적장손으로 영흥에서 탄생
1348 충목왕 4 3세 • 작은아버지 이화(의안대군)가 영흥에서 탄생
1354 공민왕 3 9세 • 아우 이천우(완산부원군) 탄생(?)
1360 공민왕 9 15세 • 할아버지 이자춘(환조)의 사망(46세)
1388 우왕 14 43세 • 위화도 회군, 아버지 이원계의 사망(59세), 시호 양평공
1392 조선
태조 1
47세 • 4대조 존호(목왕•익왕•도왕•환왕)와 4대조 능호
• 군호 책봉 : 이양우(영안군 寧安君), 왕자(6명), 모두 ‘安’자 돌림
1395 태조 4 50세 • 동북면 4대조 능에 제사 올림
1397 태조 6 52세 • 증조모 능(순릉)을 함주에서 귀주동으로 이장
1398 태조 7 53세 • 작호 책봉 : 친왕자는 공(公), 종친은 후(候), 정1품은 백(伯)
• 환조 3남 이화(의안공), 이양우(영안후), 이천우(완산후)
• 제1차 왕자의 난과 정사공신 2등에 책봉
• 공신 회맹제의 참석과 수결
1400 정종 2 55세 • 제2차 왕자의 난과 중립적 처신
1401 태종 1 56세 • 다시 영안군으로 책봉됨. 이천우(완산군). 이화(의안부원대군).
1402 태종 2 57세 • 의정부 찬성사(정2품)에 오름. 좌군도총제 겸직.
1407 태종 7 62세 • 태조 이성계(74세)와 이화(의안대군)의 사망(61세)
1408 태종 8 63세 • 명나라 사은사(謝恩使) 정사(正使)
1411 태종 11 66세 • 4대조 묘호 : 목조•익조•도조•환조
1412 태종 12 67세 • 영안군에서 완원부원군(정1품)으로 개봉. 대광보국숭록대부(최고 품계)
• 선원록을 3개로 분리한 왕친록 제작과 왕위 계승범위 축소
1413 태종 13 68세 • 임금이 주관하는 조회와 종묘 제사에 불참
• 완원부원군 이양우 부자의 가계조작에 대한 항거
1414 태종 14 69세 • 이양우의 불충과 불경죄에 대한 대간들의 상소(20여 차례)와 총사퇴
영흥 본가(20일) 및 경기도 양평(2개월)으로 4부자 귀양
1417 태종 17 72세 • 완원부원군 이양우(2월) 사망(71세), 시호 안소공
• 부조묘: 경기도 양평 양서면 대심리 능곡, 양평군 향토유적
• 완산부원군 이천우(4월) 사망(63세), 시호 양도공
1419 세종 1 • 상왕 태종은 안소공 3년 상을 마친 세 아들(흥발, 흥제, 흥로)을 위로함
• 문중 가훈: 仁• 孝• 忠
• 이름 돌림자: 仁(흥발 아들 3명), 孝(흥제 아들 8명), 忠(흥로 아들 4명)

▣ 안소공 신도비명
〇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안소공(安昭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서문(序文)과 함께
완원부원군 시호 안소공 완산 이공의 묘소는 양근군 서시면 한여울의 위쪽 계향의 언덕을 등지고 모셔져 있는데, 팔 척 높이로 쌓은 봉분은 당 같고 옥 같아서 장차 백대가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무덤 입구에 세워진 작은 빗돌이 오랜 세월로 인해 부서져 비문을 판독할 수 없게 되어 그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이 반드시 물어서 누구의 묘소인지를 안 이후에야 비로소 예의를 갖추었으므로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근자에 종손인 육품 철재가 묘도 주위를 엄숙하고 청결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사모하게 하고자 여러 종친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묘소를 정비할 제반 의식에 필요한 물품을 갖추기를 도모하여 나에게 그 일을 글로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내가 그 적임이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다행히 아직 남아있는 사적에 의거하여 감히 서술하고 명(銘)을 쓰는 바이다.

서술하건대, 공의 휘는 양우인데 계통이 왕실에서 근원하였으니 환조대왕의 손자이며, 완풍군 양평공 휘 원계의 장남이시다. 어머님은 삼한국부인으로, 부부인에 추증된 남평문씨이니, 우문관 제학 강성군 충선공 휘 익점의 따님이시다. 원나라 지정 병술년(1346) 2월 29일에 탄생하였는데, 고려말엽에 출사하여 사복정이 되었고 우리 태조께서 등극해서는 영안군으로 봉군되셨다. 무인년(1398년)에는 정종을 도와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추충협찬 정난 정사 2등공신에 책록되고, 완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품계가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오르셨다.

영락 정유년(1417) 2월 1일에 돌아가시니 향수는 72세이다. 부음이 알려지자 태종께서 매우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폐하고 제사를 내려 조의를 표하였으며, 안소(安昭)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별히 부조지전을 명하여 예장하셨다.
배위는 정경부인 선산 박씨로 예조전서 휘 정원의 따님이시다. 공보다 3년 뒤에 태어나서 공보다 1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합장해 모셨다.
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장남 흥발은 병조판서 지돈녕부사 선평군이고, 차남 흥제는 의정부 좌의정으로 추증되어 선성군에 봉해졌으며, 삼남 흥로는 도승지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어 선산군으로 봉해졌다.
손자는 열 네 분을 두셨으니 지돈녕부사 경명군 계인, 지돈녕부사 경회군 효인, 경춘군 승인, 공조판서 청천군 효연, 청부군 효충, 숭정대부 청안군 효신, 청주군 효숭, 예조판서에 추증된 청해군 효생, 공조참의에 추증된 청풍군 효례, 청하군 효지, 호조판서 진춘군 을충, 이조판서 진원군 병충, 공조참의 진해군 정충, 우윤 진천군 말충이다. 내외의 증손, 현손들은 그 수가 많아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의 위대한 공훈은 국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진실로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떨쳐 드러내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의 행적과 출사의 이력이 가승, 야사, 뇌사, 시장 등 여러 문헌에 흩어져 있다가 임진년의 전쟁을 겪으면서 거의 다 없어져서 남아 있는 것이 드무니,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후손 중에는 난리를 당하자 분발하여 형제가 함께 목숨을 바친 이도 있었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보고 배를 갈라 살신성인한 이도 있었으니, 여기에서 그 근원이 깊으면 흐름도 장구함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이 인을 쌓아서 덕을 알차게 하였음은 대략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그 자세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바이다.

공의 아버님 완풍대군께서 임종하실 때 공과 아우 천우, 조, 서에게 나아가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에게는 숙부가 있으니 너희들은 힘써 충효를 다하고 온 힘을 다해 보좌하라.”고 하였다. 그 후 공이 완산부원군과 더불어 정사공신에 책봉되었으니 공이 부자간에 있어서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에 부끄러움이 없고, 형제간에 있어서도 또한 난형난제라고 이를 수 있다. 그런즉 아버님의 뜻과 행적을 계승한 효성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두터웠던 형제간의 우애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바이다.

그 큰 뿌리와 큰 마디의 드러난 것을 서술할 만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자세한 행적과 숨은 덕이 혹 전해지지 않은 것이 있을지언정 어찌 그것이 후인들이 몹시 안타까워할 일이겠는가. 이에 명(銘)을 쓴다.

아! 공훈이 빛나는 안소공은 왕실과 정의 두터운 친척으로 일찍부터 아버님의 교훈을 익혀 가르침을 받은 후에 거듭 다짐하였도다. 너희들에게는 숙부가 있으니 형제가 함께 도우라 하시니 기미를 밝게 살펴 협찬하여 잔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니 마침내 형제가 공을 함께 이루어 기린각에 빛나시도다. ‘숫돌과 띠’ 의 맹세는 만고에 항상 존재할 것이요 뽕나무밭이 비록 큰 바다가 되더라도 그것이 후손에게 드리워지리라. 나라의 편안함과 근심됨은 의리상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일이요 국가의 근간이 되는 것은 많은 선비들이 착함에 있는 것이니 쓰러진 것 일으키고 위태로움 극복하려 몸 바칠 걸 잊지 않으셨도다. 효심을 옮겨 충성을 다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로다. 양근 땅 한여울의 무덤길은 산은 높고 물 흐름이 긴데 예장을 모심이 매우 융숭하여 지금까지도 자취 더욱 뚜렷하고 길이 후손들 번창하니 묘역은 저절로 엄숙하도다. 베풂이 있으면 보답함이 있으니 그 이치는 가릴 수 없는 것이라 특별히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을 닦아서 그 공덕을 드러내었도다. 나에게, 명(銘)하는 말씀이 있나니, 영원무궁토록 후세에 보이리라.
을사년(1905) 11월 일 자헌대부 홍문관 학사 벽진 이우면(李愚冕)이 짓고, 숭록대부 전 이조판서 해평 윤용구(尹用求)가 쓰고, 15세손 정헌대부 군부대신 용익(容翊)이 삼가 전서(篆書)를 쓰다.

슬프다. 선조 묘소의 옛 신도비가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때 부서져 비문이 누구의 손에 의해 지어졌으며, 그 비석이 언제 새겨 세워졌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 어찌 여러 자손의 슬퍼하고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도리로써 헤아리고, 묘의 법도로써 살피건대 개수의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까닭에 광무 9년 을사년에 문장 쓰고 글씨 쓰는 일을 붓을 잡은 여러 분들에게 청하였다. 장차 돌을 깎아 새겨 세우려 하였으나 흐르는 세월 속에 미처 겨를이 없어 또다시 4년을 미루어두니 더욱 더 송구스러웠다. 이에 다시 여러 종친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성진군의 새로운 돌로 옛 터에 세워서 후인들에게 보이면서, 그 대강의 전말을 비의 뒷면에 새기는 바이다. 16세손 육품 철재(轍在) 삼가 쓰다.
융희 2년(1908년) 2월 일 세우다.
[실제는 무신년(戊申年, 1908) 7월 21일 갑자에 세워졌다.]
출처 : 병인보(1926년)

▣ 안소공 공신록 • 정사공신 훈록과 명단 • 3공신 회맹록 • 수결(서명)

〇 정사공신 훈록(定社功臣 勳錄)과 명단
공신도감(功臣都監)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말씀을 올리었다. “삼가 왕의 교지를 살펴보건대, 국가에서 창업(創業)한 지가 오래 되지 않으므로 마땅히 근본을 바루고 시초를 바로잡아 국조(國祚)를 만세(萬世)에 전해야 될 것인데, 간신(奸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상왕(上王)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는 시기에,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종친(宗親)을 해치려고 도모하고, 이미 이루어진 왕업(王業)을 전복(顚覆)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습니다. 이에 의안공(義安公) 화(和)․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우리 전하(殿下) 이방원(李芳遠)․상당후(上黨侯) 이백경(李伯卿)․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조박(趙璞), 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참찬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 등이 충성을 분발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난리를 평정해서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시켰으니, 이것은 비록 전하께서 잠저(潛邸)에서 덕을 양성하여 천명(天命)이 인심(人心)과 함께 돌아와서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천명을 받아 왕통(王統)을 계승하게 된 것이지마는, 또한 세상에 이름 있는 신하가 임금을 보좌하여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공렬(功烈)에 힘입게 된 것도 진실로 전하의 교지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공로가 작지 아니하여 영구한 세대에 이르도록 잊을 수가 없으니, 청하옵건대 정사 일등 공신(定社一等功臣)으로 칭하고, 각(閣)을 세워 얼굴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할 것이며, 작(爵)을 봉하고 토지를 주되, 부모와 아내에게는 3등을 뛰어올려 봉작 증직(封爵贈職)하고, 직계(直系) 아들은 3등을 뛰어올려 음직(蔭職)을 주며,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2등을 뛰어올려 음직을 주고, 전지(田地) 몇 결(結), 노비(奴婢) 몇 명, 구사(丘史) 7명, 진배파령(眞拜把領) 10명을 주고, 처음 입사(入仕)함을 허가하며, 적장(嫡長)은 대대로 물려받아 그 봉록(俸祿)을 잃지 않게 하되, 그 자손은 정안(政案)에 쓰기를, ‘정사 일등 공신(定社一等功臣) 아무의 자손인데, 비록 죄를 범한 일이 있더라도 영구한 세대에까지 사유(赦宥)하게 할 것이라.’ 하며, 영안후(寧安侯) 양우(良祐)․청원후(靑原侯) 심종(沈悰)․봉녕후(奉寧侯) 복근(福根)․문하 시랑 이지란(李之蘭)․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장사길(張思吉)․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조온(趙溫)․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김노(金輅)․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박포(朴苞)․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정탁(鄭擢)․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천우(李天祐)․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장사정(張思靖)․동지중추원사 장담(張湛)․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우부승지(右副承旨) 이숙번(李叔蕃)․상장군 신극례(辛克禮)․대장군 민무구(閔無咎)․호조 의랑(戶曹議郞) 민무질(閔無疾) 등은 성심으로 협모(協謀)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시킨 것은 진실로 전하의 교지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공로가 작지 아니하여 영구한 세대에까지 이르도록 잊을 수가 없으니, 청하옵건대 정사 이등 공신(定社二等功臣)으로 칭호를 삼아, 각(閣)을 세워 얼굴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할 것이며, 부모와 아내에게는 2등을 뛰어올려 음직(蔭職)을 주되, 직계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등급을 뛰어올려 봉작증직(封爵贈職)하고, 직계 아들은 2등을 뛰어올려 전지 몇 결(結), 노비(奴婢) 몇 명, 구사(丘史) 5명, 진배파령(眞拜把領) 8명을 주고, 처음 입사(入仕)함을 허가하며, 적장(嫡長)은 대대로 물려받게 하여 그 봉록(俸祿)을 잃지 않게 하고, 그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쓰기를, ‘정사 이등 공신(定社二等功臣) 아무의 자손인데, 비록 죄를 범한 일이 있더라도 영구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유(赦宥)하라.’ 할 것입니다.” 소(疏)가 올라가매, 신청한 바에 의거하여 1등 공신에게는 각각 전지 2백 결(結), 노비(奴婢) 25명, 내구마(內廐馬) 1필에 안장과 고삐를 갖추고, 금대(金帶) 1개, 옷의 겉감과 안찝 각 1단(段)을 내리고, 2등 공신인 조온(趙溫)․이천우(李天祐)․장철(張哲)․이숙번(李叔蕃)․신극례(辛克禮)․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는 각각 전지 1백50결, 노비(奴婢) 15명, 내구마(內廐馬) 1필, 금은대(金銀帶) 1개, 옷의 겉감과 안찝 각 1단(段)을 내리고, 이양우(李良祐)․심종(沈悰)․이복근(李福根)․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김노(金輅)․박포(朴苞)․정탁(鄭擢)․장사정(張思靖)․장담(張湛)에게는 각각 전지 1백 결, 노비(奴婢) 10명, 내구마(內廐馬) 1필, 금은대(金銀帶) 1개, 옷의 겉감과 안찝 각 1단(段)을 내리었다. (定社功臣 錄券)
• 1등 공신 :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
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
정안공(靖安公)
이방원(李芳遠)
상당후(上黨候)
이백경(李伯卿)
좌정승
조준(趙浚)
우정승
김사형(金士衡)
참찬문하부사
이무(李茂)
참찬문하부사
조박(趙璞)
정당문학
하륜(河崙)
참찬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
참지문하부사조
영무(趙英茂)


• 2등 공신 :
영안후(寧安侯)
양우(良祐)
청원후(靑原侯)
심종(沈淙)
봉녕후(奉寧侯)
복근(福根)
문하시랑
이지란(李之蘭)
참찬문하부사
장사길(張思吉)
상의문하부사
조온(趙溫)
판중추원사
김로(金輅)
상의중추원사
박포(朴苞)
전 중추원학사
정탁(鄭擢)
동지중추원사
이천우(李天祐)
상의중추원사
장사정(張思靖)
동지중추원사
장담(張湛)
중추원 부사
장철(張哲)
우부승지
이숙번(李叔蕃)
상장군
신극례(辛克禮)
대장군
민무구(閔無咎)
호조의랑
민무질(閔無疾)
*해설: 위는 현존하는 정사공신(定社功臣) 김사형(金士衡) 녹권(錄券)에도 그대로 나오는, '태조실록' 태조 7년 10월 1일 계묘의 기사이다. 정사공신은 1398년 8월에 발생한 제1차 왕자 난(芳碩의 난) 때 종사(宗社)를 보존한 29명의 공신으로, 정종 즉위년(1398)에 정해졌다. 1등 공신은 의안공 이화 등 12명이고, 2등 공신은 영안후 이양우 등 17명이다. 정사공신은 조선초 개국, 정사, 좌명 3공신의 하나로서 정(正)공신이라 불리우는데 이들에게 교서(敎書: 왕이 직접 내리는 문서)와 녹권(錄券: 왕명을 받들어 공신도감에서 발급)을 주었다.


〇 3공신 회맹문(三功臣 會盟文)
공신도감(功臣都監) 조선 국왕 신 ‘휘(諱)’[태종 이방원]은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 등을 삼가 거느리고 감히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와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산천(山川)의 여러 신의 신령(神靈)에게 밝게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나라에 군신(君臣)과 붕우(朋友)가 있는 것은 가정에 부자와 형제가 있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충성과 신의와 성실로 그 마음을 굳게 맺어서 길이 종시(終始)를 보존해야 하는데, 하물며 귀신에 요질(要質)하고 피를 마시고 같이 맹세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우리 태상왕(太上王: 태조)은 신무(神武)한 자질로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얻고 소자(小子)도 또한 능히 이를 도와 큰 기업(基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간사한 무리들이 사심(私心)을 품어 맹세를 저버리고 서자(庶子)를 끼고 적통(嫡統)을 빼앗아 우리 형제를 해치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하였는데, 다행히 천지(天地) 종사(宗社)의 음즐(하늘의 은밀한 도움, 도교에서 사용하는 용어)과 충성되고 현명한 자들의 분발로 흉도(凶徒)가 스스로 궤멸되었습니다. 소자(小子)가 적장자(嫡長子)로서 상왕(上王)을 도와 세우니 천륜(天倫)이 바르게 되고 종사가 다시 정비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훈신(勳臣)과 더불어 맹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간사한 이가 다시 그 맹세를 저버리고 흔단(釁端)을 얽어 집안끼리 싸우게 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훈친(勳親)과 장상(將相: 장수와 재상)이 이에 응하여 평정하니 죄인은 잡혀 이미 부복(仆伏)하였습니다. 이처럼 맹세를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징험(徵驗)으로 나타났으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소자가 왕위를 계승한 뒤에도 좌명(佐命)한 신하와 더불어 같이 맹세하여 피를 마시고 더불어 보존할 것을 기약한 지 이제 여러 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삼맹(三盟: 개국, 정사, 좌명)의 신하들이 마음을 합하여 나를 보필하니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모이니 화합하여 틈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일찍이 전후로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미안하게 여길까 염려하여 특히 길일을 택한 후 삼맹의 신하를 모아 상하(上下) 귀신에게 밝게 고하고 이전의 맹세한 뜻을 다시 새겨 그 의지를 굳게 합니다. 이미 맹세한 후에는 각각 스스로 면려(勉勵)하고 같은 마음이 되어 충성으로 서로 믿고 은애(恩愛)로 서로 좋아하고 골육(骨肉)같이 친하고 금석(金石)같이 견고할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왕실을 보좌하며 사감(私感)을 잊고 오로지 공도(公道)에 따라 항상 사직을 평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할 것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마음을 합하여 시종 변하지 아니하고 길이 복록(福祿)을 누려 함께 안정과 번영을 지켜 대대로 자손들이 오늘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간사한 마음을 끼고 맹세를 어기고 화합한 마음을 저버리며 몰래 두 마음을 품어 겉으로는 친한 척하고 속으로는 시기하여 참언(讒言)을 꾸미고 흔단(釁端)을 만들어 당(黨)을 이루어 나라를 뒤집으려 하고 같이 맹세한 자를 모함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천지를 속이고 귀신을 업신여기며 군부(君父)를 저버리는 것이니 죽어서는 반드시 신의 저주가 있을 것이고 살아서는 반드시 왕의 법이 다스릴 것이며 죄는 그 몸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재앙이 자손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사직에 관계된 죄를 범하는 자를 마땅히 법으로 논함은 그전의 맹세에 기재한 바와 같으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지 그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천지신명이 위에서 밝게 비추고 있으니 각기 맹세한 말을 공경하여 길이 힘쓰고 소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에 맑은 잔과 큰 희생을 밝게 바칩니다.

국왕 신 이방원
國王 臣 李芳遠

동덕분의 개국정난정사좌명공신 의안대군 신 화
同德奮義 開國靖難定社佐命功臣 義安大君 臣 和

추충협찬정난정사공신 영안군 신 양우
推忠協贊靖難定社功臣 寧安君 臣 良祐

추충협찬정난정사공신 봉녕군 신 복근
推忠協贊靖難定社功臣 奉寧君 臣 福根

추충익대좌명공신 완산군 신 숙
推忠翊戴佐命功臣 完山君 臣 淑

분충장의동덕개국정난정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상락부원군 신 김사형
奮忠仗義同德開國靖難定社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上洛府院君 臣 金士衡

분충장의정난정사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신 하륜
奮忠仗義靖難定社佐命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晋山府院君 臣 河崙
(이하 공신 이름은 도표로 정리하였음)

〇 삼공신 회맹의 참여자 명단

공신

군호/품계

이름

공신

군호/품계

이름

국왕

이방원 李芳遠

1

開國/定社/佐命

義安大君

화 和

34

定社/佐命

驪城君

민무질 閔無疾

2

定社

寧安君

양우 良祐

35

開國

南陽君

홍길민 洪吉旼

3

定社

奉寧君

복근 福根

36

開國

興寧君

안경공 安景恭

4

佐命

完川君

숙 淑

37

開國

西川君

한상경 韓尙敬

5

開國/定社

上洛府院君

김사형 金士衡

38

佐命

鷄城君

이래 李來

6

定社/佐命

晋山府院君

하륜 河崙

39

開國/佐命

義原君

황거정 黃居正

7

佐命

昌寧府院君

성석린 成石璘

40

佐命

驪山君

김증주 金承霔

8

開國/定社

平壤府院君

조준 趙浚

41

開國/定社

花城君

장사정 張思靖

9

開國

安平府院君

이서 李舒

42

佐命

麻城君

서익 徐益

10

定社

丹山府院君

이무 李茂

43

佐命

坡平君

윤곤 尹坤

11

開國/定社/佐命

漢山府院君

조영무 趙英茂

44

佐命

陽城君

홍서 洪恕

12

定社

靑原君

심종 沈淙

45

開國

興城君

이부 李敷

13

開國

輔國崇祿大夫

오사충 吳思忠

46

開國

驪川君

민여익 閔汝翼

14

定社/佐命

完山君

이천우 李天祐

47

佐命

漆原君

윤자당 尹子當

15

開國/定社/佐命

漢川君

조온 趙溫

48

佐命

會寧君

마천목 馬天牧

16

開國/佐命

星山君

이직 李稷

49

佐命

豊川君

심귀령 沈龜齡

17

開國

宜寧君

남재 南在

50

佐命

利城君

서유 徐愈

18

開國/定社/佐命

平原君

조박 趙璞

51

佐命

鐵城君

이원 李原

19

佐命

吉昌君

권근 權近

52

佐命

潘城君

박은 朴訔

20

定社/佐命

安城君

이숙번 李叔蕃

53

佐命

瑞寧君

유항 柳亢

21

開國/定社

花山君

장사길 張思吉

54

佐命

漢平君

조연 趙涓

22

開國/定社

延城君

김락 金輅

55

開國

東原君

함부림 咸傅林

23

佐命

文城君

유량 柳亮

56

佐命

汚城君

한규 韓珪

24

開國

扞城君

손흥종 孫興宗

57

佐命

通原君

이종무 李從茂

25

佐命

漆城君

윤저 尹抵

58

佐命

谷城君

연사종 延嗣宗

26

佐命

義城君

김영렬 金英烈

59

佐命

熙川君

김우 金宇

27

定社/佐命

鷲山君

신극례 辛克禮

60

佐命

平陽君

조희민 趙希閔

28

開國/定社

淸城君

정탁 鄭擢

61

佐命

原平君

윤목 尹穆

29

開國

長城君

정용수 鄭龍壽

62

佐命

嘉善大夫

문빈 文彬

30

開國

玉川君

유창 劉敞

63

佐命

通政大夫

박석명 朴錫命

31

開國

平城君

조견 趙狷

64

佐命

通政大夫

이승상 李升商

32

佐命

蓮城君

김정견 金定卿

65

佐命

通政大夫

박응 朴膺

33

定社/佐命

驪江君

민무구 閔無咎

66

佐命

果毅將軍

송거신 宋居信

*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 1404년(태종 4) 11월 16일에 개경의 대청관(大淸觀)북쪽에서 거행됨. 공신들은 태조 때 책봉된 개국공신, 정종 대 책봉된 정사공신 그리고 태종 때 책봉된 좌명공신으로 모두 66명임.
* 삼공신 회맹록에 안소공(영안군 寧安君)은 서열이 작은아버지(의안대군 이화) 다음인 두 번째로 올라가 있음.

서열

공신

군호/품계

이름

비고

1

開國/定社/佐命

義安大君

화 和

태조의 동생

2

定社

寧安君

양우 良祐

완산군 이원계

(태조 형님)의 장남

3

定社

奉寧君

복근 福根

태조의 장손

4

佐命

完川君

숙 淑

의안대군 아들

14

定社/佐命

完山君

이천우 李天祐

완산군 이원계의 차남


〇 안소공 수결 (서명)


▣ 안소공 본가와 후손들의 관리
영흥(永興)은 안소공 이양우가 태어난 곳이며, 여기가 고향 땅이며 본가가 있으며, 논밭이 있는 곳임을 조선왕조실록(1414년 태종14)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태종)이 명하기를 “세 아들을 데리고 영흥 본가(本家)로 돌아가라”, “이미 가족을 데리고 그 고향에 안치하도록 하여, 그가 뉘우치면 장차 소환하려 하니...”,

사헌부 혹은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그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자기의 전장(田庄)에 편안히 거주하니...”, “그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향곡(鄕曲)으로 돌아가니, 금의환향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향곡에 돌아간다면, 반드시 토호(土豪)가 되어 다시 누구를 꺼리겠습니까?”⌟

위 기록들은 대간들이 제2 왕자의 난과 관련하여 완원부원군 이양우를 탄핵한 사건으로 태종은 탄핵이 무고임을 밝혀 오히려 대간들을 처벌하였다.

그리고 영흥은 환조 이자춘의 세 아들 즉 완풍대군 이원계(襄平公), 태조 이성계, 의안대군 이화(襄昭公)도 탄생하였고(四王 舊基遺跡), 그 후 태조 이성계는 15세 때에 영흥에서 함흥으로 이주하여 함흥에서 정종과 태종이 탄생하였다(회연천의 유래, 완풍대군 17세손 命士 埜). 영흥과 함흥은 함경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왕조의 발상지로 중요시 되었던 곳이다. 영흥본궁과 함흥본궁은 각각 환조 이자춘과 태조 이성계가 거주하던 옛집이다. 본궁(本宮)이란 왕(선왕 포함)이 즉위 이전에 거처한 집을 특별히 높혀 부르는 호칭이다. 이 본궁이 선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지내는 사당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영흥본궁에는 환조와 태조의 위패를, 함흥본궁에는 사왕(四王: 목조 익조 도조 환조)과 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 영흥본궁은 1396년(태조5)에 창건되었고, 중건(1632년 인조10)과 중수(1665년 현종6)를 하였다. 영흥본궁 왼쪽에 있는 준원전(濬源殿)은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으로서, 이것도 태조 5년에 세워졌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직계 4대조까지의 조상을 왕으로 추존하고 종묘(宗廟)에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이와 별개로 함흥본궁에서도 4대조의 제사를 지냈다.

본궁 제향에 대한 유교적 정비는 정조 대에 이루어져서 국가 제사의 하나로 정식화 되었는데, ⌜영흥본궁 의식⌟과 ⌜함흥본궁 의식⌟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본궁 제향은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거행되어 왔으며, 1910년 궁내부가 폐지된 이후에는 영흥의 선원청(璿源廳)에서 제사를 담당하다가, 선원청이 철폐된 이후 1917년 부터는 선파이씨(璿派李氏)의 친목계인 선원계(璿源契)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이 당시 본궁과 준원전의 제사와 관리에 참여하였던 인사들 중에 완풍대군 후손으로서 이야(李埜, 참봉)와 이인재(李麟在, 준원전 영令, 준원전 전사보典祀補, 참봉), 이종한(李鍾漢, 준원전 영), 이윤재(李允在, 영흥 군수) 등이 기록에 나타난다.

매일신보 1915년 9월 29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양전궁(兩殿宮) 제사 거행(영흥). 준원전 제사는 9월 22일 저녁에, 본궁 제사는 동 23일 저녁에 거행하였는데, 헌관(獻官)은 전사보 이인재(李麟在)이고 동군(同郡) 선파이씨로 제사에 참석한 사람은 준원전에 이야(李埜) 외 1인이고, 본궁엔 3인 이더라.⌟

순종 임금이 1917년 5월에 함경도 지역을 순행할 때에 선원계(璿源契)에 3백원을 하사하였다. 이 선원계는 영흥군 선원청이 철폐된 후에 선파(璿派) 중 이야(李埜) 외 3인이 발기하여 수년 전에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 선원계에서 매년 춘추로 준원전과 영흥본궁의 제사를 돌봐 왔는데, 이를 임금이 갸륵하게 여겼던 것이다. 또한 선파이씨에 1500원을 하사하였는데, 함흥에는 선파이씨가 약 1300호 달하였다. 순종은 17년만인 1934년 4월에 함흥본궁과 정화능에 몸소 제사를 지낼 때에도 영흥에 있는 이씨종계(宗契)에 2백원, 함흥에 있는 이씨종계에 3백원을 하사하였다. 이 당시 함남에 있는 전주이씨는 2천호 2만명이 살고 있었다.

이야(李埜, 1858년~ )는 완풍대군 17대손으로 경회군 후손이다. 호는 복제(復劑)이고 송연제 (宋淵劑) 문인(門人)이다. 효학이 겸비하여, 일성(一省)의 모범이 됨으로 정부에서 특별 포장(褒章)하였다. 영흥군 향교에서 유림 영수(儒林 領首)로 인정하는 직원(直員) 11명 중의 한분이다. 향교의 교수(敎授)는 융희(1907~1910)시대부터 직원으로 변경되었다. 완풍대군 족보 병인보(1926년 경성) 발간시 도유사(都有司) 2명 중 한 분으로 참여하였고, 족보에 「양평공 실기」를 게재하였다.



출처: 정유보(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