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파 안소공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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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공 소개

안소공

완풍대군 양평공 이원계

< 완풍대군(完豐大君) 양평공(襄平公) 이원계(李元桂)>
• 양평공 이원계 • 양평공 이원계의 연보 • 양평공 이원계의 묘소 • 양평공 이원계의 묘소 지석 (誌石) 서(書) • 양평공 신도비명: 종후손 완순군 이재완 • 양평공 실기: 17대손 명사 야(命士 埜) • 양평공의 사당(祠堂)과 제단(祭壇) • 배위 순정택주 김씨 졸기와 세종대왕 제문

▣ 완풍대군(完豐大君) 양평공(襄平公) 이원계(李元桂)

• 생졸

고려시대 1330년 10월 10일(충숙왕17)~1388년 10월 23일(우왕 14), 59세

• 시호

양평(襄平)

• 봉호

<생전> 척산군(陟山君), 완산군(完山君),
<사후> 완산백(完山伯), 완풍군(完豐君), 완풍대군(完豐大君)

• 호

불사재(不思齋)

• 공신

경성수복공신, 기해공신, 추충절의보리공신, 회군공신

• 요약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 등
여러 공신에 책록되어 완산군(完山君)으로 책봉되었다.

• 가계

할아버지는 도조(度祖) 이춘(李椿)이고, 아버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적장자이며,
건국자 태조 이성계의 백형(伯兄)이다.
자식으로는 이양우(李良祐)·이천우(李天祐)·이조(李朝)·이서(李曙=伯溫백온) 등
아들 4형제와 딸 4명을 두었다.

• 배위

① 삼한국대부인 남평 문씨 (三韓國大夫人 南平 文氏):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강성군(江城君) 증 영의정(贈領議政) 부민후(富民侯) 충선공(忠宣公) 문익점(益漸) 따님
② 순정택주 삼한국부인 경주 김씨 (順靜宅主 慶州 金氏): 찬성사(贊成事) 김용(鏞) 따님

• 생애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내부령(內府令)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1361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활약하였다. 특히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조천주(趙天柱) 등과 함께 안우(安祐)의 휘하에 종군하여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1363년에 개경을 수복한 공(경성수복공신)과 기해년(1359)에 홍건적을 격퇴한 공(기해격주홍적공신=기해공신)으로 각각 이등공신에 책록되고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다.

1375년(우왕 1) 원나라에서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왕(瀋王) 탈탈불화(脫脫不花)가 입국한다는 보고에 따라 국경방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원수(元帥)가 되어 서북방어의 임무를 담당하였다.이어 1377년 나세(羅世)의 휘하로 종군, 강화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1380년 왜구가 또다시 광주와 능성(綾城)·화순(和順) 두 현(縣)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최공철(崔公哲)과 함께 전라도 방어의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황산싸움에서 양광도순검사(楊廣道巡檢使)였던 이원계는 원수로 임명되어,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인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이렇게 고려조에 보리공신에 책록되었고 품계는 삼중대광(정1품 문산계)에 이르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에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 휘하의 팔도도통사 조전원수(八道都統使助戰元帥)로 출전하였다가 회군 5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0월 23일). 지석(誌石)에 유서음시(遺書吟詩)라는 제목으로 실린 시(詩)가 있다(1908년 묘소 개수 시 발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뜻을 같이 한 공로로 1390년(공양왕 2)에 위화도 회군공신 2등,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태조 2) 7월에 회군공신으로 재책봉되었다. 완산백(完山伯)에 추봉되고 시호는 양평(襄平)이다.1867년(고종 4) 초간된 『선원속보』에, 추존(追尊) 사왕(四王: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자손 21파보가 포함되면서 사왕의 자손들에 대한 예후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872년(고종 9) 영종정경(領宗正卿: 1품을 초월한 숭품崇品)에 증직되었고, 군호가 완산군에서 완풍군으로 봉해졌고, 이어서 완풍대군(선원계보기략 1960년, 완풍대군 재정서 1976년)으로 개봉되었다.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인 정릉(定陵: 환조의 능) 우측(350보 거리)에 있으며, 신도비문은 종(從) 19대손 상보국승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완순군(完順君) 재완(載完 1855~1922)이 지었다. 완풍대군은 문씨 사이에 完原府院君 良祐, 完山府院君 天祐 등 2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김씨 사이에 完南君 朝, 完寧君 曙 등 2남 3녀를 두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원속보(1900년), 대동기문, 완풍보감(2003년, 파시조 완풍대군 양평공 휘 원계),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안소공세보 총편 (2017년 정유보, 완풍대군 양평공 휘 원계).

▣ 완풍대군 양평공 이원계의 연보
연도 왕조 나이 주요행적
1315 고려시대
충숙왕 2
• 아버지 이자춘(환조) 덕원에서 탄생
1330 충숙왕 37 탄생 • 이자춘 1남 양평공 이원계 영흥에서 탄생
1333 충숙왕
복위2
4세 • 어머니 한산(韓山) 이씨 사망
1335 충숙왕
복위4
6세 • 이자춘 2남 이성계(태조) 영흥에서 탄생
1342 충혜왕
복위3
13세 • 할아버지 이춘(도조) 사망
1346 충목왕 1 17세 이원계 1남 이양우(완원부원군) 영흥에서 탄생
1348 충목왕 3 19세 • 이자춘 3남 이화(의안대군) 영흥에서 탄생
1359 공민왕 8 30세 • 홍건적 토벌과 개경 수복에 공헌
1360 공민왕 9 31세 • 아버지 이자춘(환조) 사망(46세)
1363 공민왕 12 34세 • 내부령(內府令) 이원계(李元桂) 경성수복공신 2등에 책봉(3월)
• 판사(判事) 이원계 기해격주홍적공신 2등에 책봉(11월)
• 홍건적 격파 공로로 척산군(陟山君)에 책봉
1375 우왕 1 46세 • 동지밀직(同知密直) 이원계를 원수(元帥)로 해서 서북면 방어
1377 우왕 3 48세 • 원수(元帥)로서 전라도 지역의 왜적 방어
1380 우왕 6 51세 • 전라도 황산대첩에 척산군(陟山君) 원수(元帥)로 참여
• 양광도 순검사로서 추충절의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完山君)에 책봉
1388 우왕 14 59세 • 요동정벌 참여.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 위화도 회군(5월 22일)
완산군 이원계 자결(10월 23일, 59세), 시호 양평공
1390 공양왕 2 • 회군공신 2등에 책봉
1392 조선시대
태조
완산백(完山伯) 추봉(태조 원년), 회군공신 재책봉(태조 2년 1393)
1872 고종 9 완풍군(完豐君): 4대왕(목조 익조 도조 환조) 자손의 군호 추봉
1960 대한시대 완풍대군(完豐大君) 군호 호칭:
 전주이씨계보기략: 1960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완풍대군 재정서(裁定書): 1976년 대동종약원 이사장 이봉우

▣ 완풍대군 양평공 이원계의 묘소
완풍대군 양평공 이원계의 묘소
*완풍대군 양평공(襄平公)의 묘소는 부친인 환조대왕(이자춘) 정릉(定陵)의 오른쪽 산줄기 병좌(丙坐)에 모셔져 있다. 부친과의 거리가 350보이다. 완풍대군의 오른쪽 산줄기에는 환조대왕의 형인 완창대군 이자흥의 묘소도 보인다. 묘소 앞에 환조대왕이 살았던 경흥전(慶興殿)이 표시되어 있다.

▣ 양평공 이원계의 묘소 지석 (誌石) 서(書)

<지석 앞면(石面)>
[完山君諱元桂字元桂全州李公之墓] ‘완산군(完山君) 휘는 원계(元桂)요 자(字)도 원계(元桂)인 전주(全州) 이공(李公)의 묘이다’
<지석 뒷면(石陰)>
[完山君諱元桂字元桂全州李公之墓] [遺書吟詩] (유서음시)
[三韓故國身何在] 삼한 땅 이 나라에 내 몸 둘 곳 어디인고
[地下願從伯仲遊] 지하에서 태백, 중옹을 따라 노닐고 싶어라
[同處休云裁處異] 같은 처지에서 처신함이 다르다 말 마오
[荊蠻不必海桴浮] 형만 가는 바다에 뗏목 띄울 일 없으리라
해설 : 양평공은 주(周)나라 태백(太白)과 중옹(仲擁) 그리고 계역(季歷)의 3형제 처지와 흡사하여 이를 시(詩)로 표현한 것이다. 주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셋째 아들 계역을 왕위로 세우려 하니 그 형 태백과 중옹이 양위의 명분을 가지고 형만(옛날 楚 지방을 일컫는데 泰伯과 仲雍이 살았던 곳)으로 도망을 갔다. 그 후 계역은 왕좌에 조금 있다가 그 아들 문왕(文王)에게 전위하니 이 임금이 곧 문왕 창(昌)이다.



▣ 양평공 신도비명: 종후손 완순군 재완

〇 완풍군(完豐君) 양평공(襄平公) 신도비명 (神道碑銘)
공의 휘(諱)는 원계(元桂)이며 성(姓)은 이씨로 환조대왕(桓祖大王)의 첫째 아드님이시다.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 李氏)로 지순(至順) 경오(庚午)년(충숙왕 17년 1330년) 10월 10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남다르고 일찍부터 큰 뜻을 품으셨다.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여 척산군(陟山君)에 봉(封)해졌고, 우리 태조께서 남쪽으로 운봉(雲峰)의 왜란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홍건적(紅巾賊)을 방어함에 공이 실로 좌우에서 도우셨으며, 양광도순검사(楊廣道巡檢使)로서 추충절의 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推忠節義 輔理功臣 三重大匡 完山君)에 녹훈(錄勳)되었다. 홍무(洪武) 무진(戊辰)년(1388년)에 태조께서 위화도(威化島)로부터 대의를 들어 회군(回軍)할 때에 공이 협조하여 도운 것이 실로 많으셨다. 이 해 10월 23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병좌(丙坐) 자향(子向)의 언덕에 계시니 이는 정릉(定陵)의 오른쪽 줄기이다.
태조께서 보위(寶位)에 등극하면서 완산백(完山伯)에 추봉하고 양평(襄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께서 임신(任申)년(1872)에 특별히 명하여 완풍군(完豐君)으로 추봉하였다.

배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강성군(江城君) 증영의정(贈領議政) 시호가 충선공(忠宣公)인 익점(益漸)의 따님이시다. 두 번째 부인은 (繼配)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찬성사(贊成事) 용(鏞)의 따님이시다. 처음에 모두 삼한국부인(三韓國夫人)에 봉해졌고, 임신년(壬申年: 고종 9년)에 부부인(府夫人)으로 추봉되었다. 아들 넷과 딸 셋이 있다. 장남은 완원 부원군(完原府院君) 양우(良祐)이고 차남은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천우(天祐)이며 딸은 중랑장(中郎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이상은 문씨(文氏)가 낳았다. 조(朝)는 완남군(完南君)이요 서(曙)는 완녕군(完寧君)이요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과 승지(承旨) 변중량(卞仲良)에게 시집갔다. 이상은 김씨가 낳았다. 증손 이하는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공은 고려의 운명이 다하고 천명(天命)이 이미 떠나간 때를 당하여 무략(武略)을 베풀어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널리 인덕(仁德)을 베풀어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큰 공업을 도와 이루어 조선의 무강(無彊)한 기초를 열었으며 여러 아들들을 경계하여 타일러서 충의(忠義)에 힘쓰도록 하였다. 대를 이은 공훈이 온 세상에 빛나고 자손이 번창하여 자못 온 나라에 두루 퍼졌다. 전하여 오는 말에 이르기를 “공덕(功德)이 남에게 미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뒤가 있다.” 하였으니, 어찌 그 말을 믿지 않겠는가. 공의 묘가 선침(仙寢)에 가까워 봉분을 고치고 수리하지 못한 지 거의 오백 년이 되었다. 무신(戊申)년 8월(1908년)에 종손 철재(轍在)가 진정(陳情)함으로써 임금이 특별히 옛 봉분을 개수할 것을 허락하여 현각(顯刻)을 세웠으니 특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자손이 은지(恩旨)에 감동하여 비로소 묘를 살피고 정비하였다. 오래 묵은 잣나무로 빽빽하게 에워싸여 묘역이 완연하였으니, 아, 또한 기이하도다. 지난 정사년(丁巳年: 1917)에는 임금께서 북쪽으로 순행(巡幸)하여 능침(陵寢)에 참배할 때에 내탕금을 하사하여 공의 제수를 돕게 하고 이제 또 부근의 나무를 베어서 묘사(墓舍)를 짓게 허락하시니 전후(前後)의 은전(恩典)이 지극히 각별한 것이다.

철재(轍在)가 장차 비석을 세워서 후세에 전하고자 하여 나에게 그 비문을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의 높고 큰 공훈(功勳)이 야사에 흩어져 있어 남의 이목(耳目)에 쉽게 드러나니 어찌 내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始我穆王 시아목왕]

우리 목조대왕께서는

[肇跡王業 조적왕업]

처음 왕업의 기초를 여시었고

[至于太祖 지우태조]

태조대왕에 이르러서는

[天命用協 천명용협]

천명(天命)이 도우셨네.

[公實左右 공실좌우]

공이 실로 좌우에서 협찬하시어

[功光奕葉 공광혁엽]

공렬(功烈)의 빛이 후대에까지 혁혁했네.

[夙平西亂 숙평서란]

일찍이 서쪽의 난을 평정하였고

[又奏南捷 우주남첩]

또 남쪽의 승전을 아뢰었네.

[蓋世英烈 개세영렬]

세상을 덮을 뛰어난 공렬은

[人莫與躐 인막여렵]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고

[志謙操約 지겸조약]

뜻이 겸손하고 절조가 굳어

[韜晦不挾 도회불협]

재주와 학문을 감추어 뽐내지 않았네.

[衣履托藏 의리탁장]

공의 의리(衣履: 遺骸)를 모시니

[咸山鬱疊 함산울첩]

함흥의 산은 더욱 울창하도다.

[恩言曠絶 은언광절]

은혜로운 임금의 말씀은 유례(類例)가 없었으며

[至誠允愜 지성윤협]

지극한 정성은 진실로 흡족한 일이었네.

[幽久必顯 유구필현]

숨은 것이 오래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니

[玄理始曄 현리시엽]

현묘한 이치가 비로소 빛났다네.

[我銘不諛 아명불유]

나의 이 비명(碑銘)에는 거짓이 없나니

[垂千百劫 수천백겁]

수백 겁(劫)에 공의 공적을 드리우리라.
종(從) 19대손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완순군(完順君) 재완(載完) 삼가 짓다.


▣ 양평공 실기 (襄平公 實記): 17대손 명사 야(命士 埜)

〇 양평공 실기(襄平公 實記)
공의 휘(諱)는 원계(元桂)이며 자(字) 또한 원계(元桂)이다. 환조 대왕의 첫째 아드님이며 그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공이 4세가 되던 해(1333년)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자 환조께서는 공의 외조부인 이씨 집에 공을 맡겼다. 공이 점점 자라면서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10세(1339)에 경전을 두루 통하였다.

어느 날 자신이 백두산의 대덕사(大德寺)에 있으며 지금 지리산을 향하여 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노승(老僧)이 있었는데, 그는 대문에 이르러 합장하고 절하며 말하였다. “10여 년 전에 복성(福星)이 우리나라 쪽으로 떨어지더니 지금 공자(公子)를 보니 과연 복성(福星)이 인간 세상에 귀양왔도다. 이로부터 50년 뒤에 우리나라의 태평함이 어찌 공자의 힘이 아니겠는가. 다만 애석히 여기는 것은 매화 마을의 봄 경치는 오랜 세월[千秋]이 흘러도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고 신묘한 약이 달리 쓰이니 그 덕(德)이 형산(衡山)처럼 높도다.” 하며 탄식을 그치지 않다가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사양하고 떠났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공은 태조와 더불어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공이 하루는 하인에게 비단 10필을 주어 울도(鬱島)에서 신마(神馬)를 사오게 하였다. 그리고 태조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말은 반드시 쓰일 곳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 뒤에 홍건적을 토벌할 때에 적이 태조의 등 뒤에서 창으로 찔러 상황이 매우 위급하였는데 태조가 말을 채찍질하여 성을 뛰어넘게 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뒤에 또 군대를 통솔하여 남쪽에 있을 때 밤에 갑자기 마음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어 곧바로 일어나 칼을 차고 태조 침소로 가서 병풍 뒤에 숨었다. 잠시 뒤에 자객(刺客)이 공중으로부터 날아 내려오자 공이 칼을 휘둘러 자객의 허리를 베었다. 태조는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이는 최영이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더해 가는 것을 시기하고 또 이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보낸 자객이었다.

환조는 완산(完山)과 태조, 그리고 의안(義安)의 세 아들과 더불어 시사(時事)를 논의하였는데, 하루는 완산(完山)에게 이르기를 “내가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신인(神人)을 만나 너희 세 사람의 앞길을 논평하였다. 완산을 논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빼어난 자태를 낳아 어진 풍모가 세상을 덮고 밝은 지혜가 끝이 없다. 뜻은 선인의 발자취를 좇아서 드러내는 데 있으므로 용성(龍星)이 경계할 만하다. 형(荊)도 아니고 만(蠻)도 아니니 태백(泰伯)은 어디로 갔는가? 후일 조정을 바로잡음에 응당 오래도록 쌓은 덕망을 비추리라.'라고 하였다. 의안에 대해 말하기를'좋은 말[騄馬]로 몸을 부지하고 지혜와 꾀가 빼어나니 충성을 다하여 돕고 인도하여 처음과 끝을 한 마음으로 한다. 두 마리의 말을 경계하라. (이하 16글자가 빠져 있다)'라 하였다. 태조를 논하여 말하기를 '화개(華蓋)가 동쪽에 이르니 자리[位]와 녹(祿)이 겸비하였다.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게 따르니 자손이 창성(昌盛)할 것이나 세 가지의 어려움을 경계해야 한다.'하였다. 너희 형제는 우애를 독실하게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면 우리 이씨가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인(聖人)은 한 명의 죄가 없는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일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 말을 마땅히 생각하고 생각하라. 예언은 비록 믿을 수 없으나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劍)은 이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참언(讖言)이 세상에 자자하다. 너는 마땅히 자취를 감추어서 세 가지 어려움의 재앙을 삼갈지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공은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척산군(陟山君)이 되었으며 양광도(楊廣道) 순찰사(巡察使)로서 태조를 도와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이 있어서 추충절의(推忠節義) 보리공신(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해졌다. 홍무(洪武) 을묘(乙卯)년(1375)에 이성만호(泥城萬戶)가 심왕(瀋王)이 배반자 김의(金義)를 이끌고 이미 신주(信州)에 당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공이 당시 밀직(密直)으로서 원수(元帥)가 되어 각 도(道)에서 징병하였다. 정사년(丁巳年: 1377) 3월 왜구가 강화를 침략하자 격파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380)에 적이 또 들어와 노략질하니, 양광 전라 경상 삼도의 연해가 온통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태조가 당시에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가 되었으며, 변안렬(邊安烈), 왕복명(王福命), 우인열(禹仁烈), 도길부(都吉敷) 박임종(朴林宗), 홍인계(洪仁桂), 임성미(林成味)와 공이 팔원수(八元帥)가 되어 편장(褊將) 이두란(李豆蘭), 배극렴(裵克廉) 종사(從事) 이대중(李大中), 우신충(禹臣忠), 이득환(李得桓), 이천기(李天奇), 원영수(元英守), 오일(吳一), 서언(徐彦), 진중기(陳中奇), 서금광(徐金光), 주원의(周元義), 윤상준(尹尙俊), 안승준(安升俊) 등과 함께 태조를 보좌하여 운봉(雲峰: 전북 남원 소재)에서 싸워 적을 크게 무찔렀다.

무진년(戊辰年: 1388) 4월에는 신우(辛禑: 고려 32대 우왕禑王)가 재상 최영(崔塋)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서 명(明)나라를 침범할 계획을 세우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태조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고 공을 도통사(都統使)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삼았다. 군대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자 마침 장마를 만나 큰물이 장차 넘치려 하였다. 공은 태조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하루 밤을 지연하면 형세가 반드시 건너기 어려울 것이니 곧 바로 회군령을 내려 군사들의 목숨을 구하라.” 고 하였다. 태조가 곧 명령을 내려 회군하였는데 군사들이 강을 건너기가 무섭게 물이 섬을 삼켰다.

5월 을미(乙未)일에 태조가 백성들을 위하여 이미 천명(天命)이 떠난 고려 조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공이 태조를 돕고자 하였으나 앞으로 나설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여도 감히 천자(天子)의 땅을 범할 수 없고 물러서고자 하여도 감히 당시 주군(主君)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진퇴유곡이었다. 그러나 공은 천명(天命)이 결국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를 알았다. 공은 안소공(安昭公), 양도공(襄度公), 완남군(完南君), 완녕군(完寧君) 등 네 아들을 불러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 때문에 세상을 피하지 말고 너희 숙부를 도와 충효를 다하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10월 23일 마침내 독[鹵]을 마시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 날에 크게 바람이 불고 폭우가 내렸으며 번개가 쳤다. 필명시(畢命詩) 한 수를 남기셨다. 그 시에 말하기를, “삼한(三韓)의 내 조국 이 몸 갈 곳 어디인가, 지하에서 태백(泰伯), 중옹(仲雍)과 더불어 놀고 싶어라, 같은 처지에 그 행동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형만(荊蠻)에 굳이 뗏목을 띄울 일이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이는, 세상을 피하여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는 일찍 기미를 보고 한번 죽어서 편안함만 같지 못하다는 공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태조가 등극하여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追封)하고 양평(襄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 고종(高宗) 임신년(壬申年: 1872)에 완풍대군(完豐君) 겸 영종정경부사(領宗正卿府事)로 추봉하였다.

묘는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에 있으며 정릉(定陵) 오른쪽 줄기 병좌(丙坐) 자향(子向)의 언덕이다. 선침(仙寢: 왕릉, 곧 환조대왕의 정릉)에 가까워서 봉분의 개수를 하지 못한 지가 무릇 500여 년이었다. 무신(1908) 8월에 17대 종손 철재(轍在)가 진정하자 임금께서 특별히 옛 봉분을 개수하여 현각(顯刻)을 설치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특별한 헤아림이다. 같은 해 12월에 흙을 파서 봉분을 열자 지석(誌石)이 하나 있었는데 그 석면(石面)에는 ‘완산군(完山君) 휘는 원계(元桂)요 자(字)도 원계(元桂)인 전주(全州) 이공(李公)의 묘이다[完山君諱元桂字元桂全州李公之墓]’라고 하였고 지석 뒷면에 제(題)하기를 ‘유서음시(遺書吟詩: 유서로 읊은 시)'라 하여 앞의 필명절구(畢命絶句)가 있었다. 다음날에 그것을 묻고 다시 봉축하니 능침(陵寢)으로부터 거리가 350보가 된다.

지난 정사년(丁巳年: 1917)에 임금께서 북쪽으로 행차하여 정․화릉(定和陵)에 참배할 때에 특별히 내탕금(內帑金)을 하사하여 공의 제수(祭需)를 돕게 하고 또 가까운 곳의 나무를 베어서 묘사(墓舍)를 짓게 허락하시니 전후의 은전(恩典)이 매우 각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 자제 안소(安昭), 양도(襄度) 두 공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서 함께 도모하여 공(功)을 세웠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고려의 충신이 되고 아들은 본조(本朝, 朝鮮)의 훈신(勳臣)이 되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繼承)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만히 상고하건대, 여말(麗末) 국초(國初) 혼례에 부인을 둘․셋을 두는 법이 있었다. 익조(翼祖)는 두 부인을 두셨으니 최씨(崔氏)와 손씨(孫氏)이고, 환조(桓祖)는 세 부인을 두셨으니 최씨(崔氏)․이씨(李氏)․김씨(金氏)이다. 태조의 한씨(韓氏)․ 강씨(康氏)의 두 왕후와 태종의 민씨(閔氏)․신씨(辛氏)에게서도 <그 풍습을> 볼 수 있다.

태조가 즉위한 지 2년 되는 계유년(1393)에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이 지은 「정릉신도비(定陵神道碑)」에서 말하기를 “왕(桓祖)은 무릇 세 번 장가들었는데, 이씨(李氏)가 나은 아들은 원계(元桂)로 고려에 벼슬하여 완산군(完山君)에 봉하였으나 돌아갔고, 김씨(金氏) 정안옹주(定安翁主)가 나은 아들은 화(和)인데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다.'하였다. '태조자손록(太祖子孫錄)'에 말하기를 방연(芳衍)이 일찍 죽으니 원윤(元尹)으로 추증하고 방석(芳碩)은 어리다.” 하였다. '능전지(陵殿誌)'에는 정묘년(丁卯年)에 이색(李穡)이 지었다고 한 구신도비문(舊神道碑文)이 있는데 그 비문에서 말하기를 “측실(側室) 이씨가 아들을 낳으니 원계(元桂)요, 김씨가 아들을 낳으니 화(和)이다. 방연은 성균관(成均館成均) 박사(博士)요, 방석은 군기녹사(軍器錄事)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씨․김씨가 측실이라면, 서원군(西原君: 정총)이 태조가 등극하여 정사(政事)를 처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찌 감히 왕이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고 말하고, 두 비(妣)로 하여금 의비(懿妃)에 대하여 무례하게도 나란히 삼취(三娶)했다고 말하였겠는가. 또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원윤(元尹)에 추증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성균관(成均館成均) 박사(博士)가 되었겠는가.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은 6년 후 계유년(癸酉年)에도 오히려 어리다고 한 사람인데, 어찌 6년 전 정묘년(丁卯年)에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될 수 있었겠는가. 대개 지금 그 능비(陵碑)가 아직까지도 서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금석(金石)의 문은 옛 비문의 지상(紙上)에 잘못 전하는 것과 함께 다룰 수 없음이 분명하다.

아! 공의 큰 공렬(功烈)이 반드시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및 기타 여러 문헌에 등재되어 있는데도 불초(不肖)하고 혼미(昏迷)한 자손이 듣고 보는 것이 고루(固陋)하여 능히 행적의 만(萬)에 하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였다.

17대손 명야(命埜: 命士 埜) 삼가 기록함

출처 : 병인보(1926년)
해설 : 이야(李埜, 1858년~)는 완풍대군 17대손으로 경회군 후손이다. 호는 복제(復劑)이고 송연제 (宋淵劑) 문인(門人)으로 참봉 벼슬을 하였다. 효학이 겸비하여, 일성(一省)의 모범이 됨으로 정부에서 특별 포장(褒章)하였다. 영흥군 향교에서 유림 영수(儒林 領首)로 인정하는 직원(直員) 11명 중의 한분이다. 족보 병인보(1926년 경성) 발간시 도유사(都有司) 2명 중 한 분으로 참여하였고, 양평공 실기에 대해 처음으로 글을 지어서 족보에 게재하였다.

▣ 양평공의 사당(祠堂)과 제단(祭壇)

사당/제단

위패

장소

연도

삼의사(三義祠)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

충민공(忠愍公) 김인찬(金仁贊)

양평공(襄平公) 이원계(李元桂)

함남 북청

1901년

선원사(璿源祠)

양평공(襄平公) 이원계(李元桂)

함남 이원

1909년

기형사(機形祠)

양평공(襄平公) 이원계(李元桂)

선성군(善城君) 이흥제(李興濟)

청안군(淸安君) 이효신(李孝信)

열사(烈士) 이준(李儁)

함남 북청

-

흥경단(興慶壇)

완풍대군 양평공 이원계

배위 부부인(府夫人) 남평 문씨

배위 부부인(府夫人) 경주 김씨



경기 양평

1984년

완풍대군 배위 순정택주(順靜宅主) 김씨 졸기(卒記)와 세종대문 제문(祭文)

조선왕조실록

1426년 세종 8년
10월 22일

• 순정택주 김씨가 죽으니 부의를 내리다

순정택주(順靜宅主) 김씨(金氏)가 졸(卒)하니, 쌀과 콩 도합 40석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1426년 세종 8년
11월 27일

• 순정택주 김씨의 빈소에 제사를 내리다

중관(中官)을 보내어 순정택주(順靜宅主) 김씨의 빈소(殯所)에 제사를 내리었다. 그 교서(敎書)에 말하기를,

"목숨이란 하늘이 준 것이니 길고 짧은 기한은 피하기 어렵고, 은혜는 스스로 친히 베푸는 것이니 마땅히 슬픔과 영화로운 전장(典章)을 극진히 할 것이로다. 아름다운 명가(名家)의 처녀로서 우리 종실(宗室)의 주친(周親)의 배필이 되었도다. 정순(貞順)한 부녀(婦女)의 도는 일찍이 규중(閨中)의 법[模範]을 이루었으며, 자애(慈愛)롭고 화기스러운 어머니의 교훈은 문벌(門閥)을 길이 빛나게 하였도다. 이미 한 집안의 지존(至尊)으로서 친척들의 올바른 사표(師表)가 되었으며, 더욱이 잠저(潛邸) 때로부터 다행히 한 마을에 살아서 특별한 옛 은혜가 있어 마침내 잊지 못했었도다. 오래 살아서 더욱 편안과 영광을 누릴 줄 알았는데, 마침내 늙은 후의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하고 졸지에 수의(穟衣)를 더하는 탄식을 이루었도다. 부음(訃音)이 이르자, 모두들 몹시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도다. 이제 중관(中官)을 보내어 약소한 제물을 드리노니, 아아, 살아서 사랑함을 더하여 친척을 보살피는 정을 두터이 했으니, 죽으매 휼장(恤章)을 보내어 세상을 떠나는 예의를 다하노라." 하였다.